의미가 거주하는 스펙타클 _정용도 미술평론가 | space 2005.1

1967년 광주에서 출생한 이한수는 혼성문화에 대한 주제로 디지털 영상작업을 하는 주목받는 작가이다. 독일 브라운슈바익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이후 동대학교에서 마이스터슐러를 취득했다. 2001년 서울 인사미술공간에서 ‘천왕성에서 온 일기예보'란 타이틀로 첫 개인전을 연 후 총 5회의 개인전을 치룬바 있으며, 그 외 15회가 넘는 다수의 단체전 경력이 있다.

예술이 수행하는 종교성에 대한 보편적 해석은 인간 존재의 기원을 탈물질적 탐구를 통해 의미의 그물망을 개념적으로 축조해내는 끝없는 과정이 될 것이다. 이는 과학이 종교적 기능을 대신하는 정도로 까지 심화된 현대사회에서 더욱 일반화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상들 속에 내재하는 미학적, 철학적 근거들은 예술이건 여타 다른 속성들이건 간에 진리에 대한 혹은 진리의 본질적 모습에 대한 내용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나 갈망에 관계된다. 그러나 존재론적으로 무엇인가가 물질적인 구체성을 수반하고 있지 않은 내용을 향해 진행된다면 추상적인 의미와 개념적 특성으로 인해 우리에게 지속적인 혼돈을 주기도 한다. 이한수의 작품이 제기하는 문제들은 존재에 관한 것이다. 존재는 종교적 영역의 논의에서 그리고 진리탐구의 지향성의 영역이라는 전제조건 속에 거주한다. 그리고 예술과 관련된 원초적 상황 속에서 볼 때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플라톤적인 의미에서 모방을 자제해야만 한다. 이것이 아름다움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는 우선적인 조건이다. 이런 방식을 통해 최초의 원상으로서의 아름다움의 이데아에 대한 갈망은 진리와의 동일성을 획득하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아름다움에 대한 문제를 예술의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방법적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현대사회의 기술적 환경이 제기하고 있는 예술과의 관계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는 이한수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의미의 영역을 형성하는 개념적 도구들이기 때문이다.

   이한수에게 기술은 매체적 특성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는 매체의 본질을 충실히 대변하는 수단일 뿐이다. 여기서 본질은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하나는 매체의 본질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보장하는 개념적인 차원의 본질이다. 그리고 이한수에게는 이것을 하나의 지속적인 상황으로 종합하는 것이 예술의 영역이다. 즉 본질에 의해 시작되고, 본질로 인해 형성되는 다양한 미학적 상황들을 변증법적인 지향 상태로 드러내는 것이 바로 이한수가 자신의 예술영역을 확대해 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예술영역을 형성하고 확대해 가는 과정에서 존재에 각인된 본질의 흔적들을 발견하는 것은 의미의 본질에 대한 해석보다는 현상을 드러내는 방법을 통해 가능해지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이런 것들은 불가능한 것들을 인간적 삶의 내용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의미의 영역이 되는 것이고, 현대 사회에서는 하나의 스펙타클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스펙타클로 대변되는 다원성

이한수 작품에서 종교적인 도상들로 이루어지는 풍경들은 마치 현대도시의 광고판 이미지들처럼 깊은 예술적 아우라를 생산해내지 않는다. 미지의 우주인에 대한 신비주의적 차원을 종교적으로 형식화시킨 ‘무아몬스터 테크노피아 1'에서의 종교적인 형식과 내용은 본래적 의미에서 종교적 신비주의만큼이나 우리에게 생소한 경험을 요구한다. 여기서 의미는 형식을 구성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가지고 있는 형식적 원형의 문제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것은 백남준이나 독일작가 요셉 보이스(Joseph Beuys)가 그들의 작품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종교성과 마찬가지로 자기치유적 과정으로서의 예술, 혹은 사회에 대한 메시지로서의 형식을 지닌 예술적 경험에 대한 다른 방식의, 즉 포스트모던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메시지들은 작가가 형식화 시키는 그만의 종교적 도상들을 통해 더욱 강화된다. 이것은 종교 중에서도 불교의 자아각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의 지향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특히 그의 최근 작품에서는 초기작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의 경험화 과정과는 다른 차원의 특성들을 보여준다.

   이한수의 예술에서 중요한 화두는 의미의 다원성이다. 그것이 종교적인 도상을 통해 드러나건 혹은 일상의 키치적인 이미지들을 통해 드러나건 간에 그가 추구하는 의미의 기억들은 -예술의 근원에 대한- 형식을 초월한 단상들의 종합적인 상태, 하나의 스펙타클이다. 스펙타클은 프랑스의 상황주의자 기 드보르가 말하는 이미지로 축적된 문화의 단상들이다. 특히 그의 다원적인 뿌리를 지니고 있는 단상들은 레이저 빔에 의해 관객들에게 수용되는 기술적인 결과물들이 만들어내는 혼성적인(hybrid) 종교적 도상들이다. 이런 종교적 도상들은 레이저 빛에 의해 이미지의 스펙타클로 전환된다. 이렇게 결과적으로 생산된 스펙타클이 가지고 있는 세속적 양태들은 야광빛에 의해 혹은 와해된 종교적 이미지들의 다양한 표층들을 통해 발산된다. 게다가 작품과 함께 제시되는 테크노사운드들은 정신적 유목민들 혹은 21세기 예술가들의 음악이 된다. 이같은 정신적인 방랑자들의 음악은 마치 이미지처럼, 즉 이한수의 작품이 만들어내는 깨달음과 세속의 경계를 방황하면서 지속적으로 삶의 욕망과 희망이라는 이분법적인 경계를 넘어 제3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바로 이 제3의 영역은 스펙타클한 풍경이다. 풍경이 모두(the beginning)가 되어 펼쳐지는 빛의 발산은 부처의 양미간 사이의 백호(the third eye)처럼 현대인들의 깨달음의 풍경이 된다. 이한수에게 깨달음은 독일 철학자 헤겔이 말하는 예술, 종교, 철학의 과정을 거쳐 자기동일성을 회복하는, 즉 예술의 진정한 예술적 원형으로의 회복이 될 수 있는 것이고, 자기치유적인 과정의 양태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생명성의 회복으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의미가 거주하는 공간으로서의 예술작품이라는 다소 모더니즘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한수의 작품을 해석하는 부분에 있어 무리가 있을 수도 있다. 사실 그의 작품은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한데, 이는 앞에서도 말했듯 그의 작품에서 본래적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종교적인 도상들이 드러나는 방식의 세속성, 작품 전체가 만들어내는 시각적 풍경의 스펙타클한 속성들로 인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을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예술적 상황의 회복이라는 좀더 넓은 관점에서 본다면 이한수가 예술적으로 지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이런 식의 인식의 틀이 예술적 속성에 관한 문제가 되는 것은 비물질적 차원에서 전개되는 미디어아트의 매체적인 특성으로 인해 새로운 예술형식을 바라보는 인식의 변화가 개입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초현실주의자들이 말하는 예술의 무의식적 순수성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작품이 본래 삶의 기능적인 측면이 아닌 의식의 트랜스(trance)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으로서, 즉 인간의 본질적인 무의식의 세계를 반영하는 ‘진실성'의 차원과 관계가 있다는 측면에서 접근함으로써 의미보다는 형태의 원형적 추상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 의미의 추적이 불가능한 세계로의 전이(transfer)를 지향한다는 면에서 앞에서 언급한 현대사회의 이미지 문화와 연결이 가능할 것이다.

제3의 세계와 현실세계와의 소통

현대사회에서 이미지는 과학과 더불어 하나의 신화적 양태로 제시되고 있다. 여기서 예술에 대한 비판적 관찰이나 본질적인 탐구 같은 인간의식의 지향성과 관련된 활동들은 잠시 멈추게 된다. 그리고 이미지 자체가 우리의 존재를 규정하는 양식적 특징이 된다. 이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 예술의 특성이라는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의 언급에서처럼 예술의 본래적인 추상성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지가 속성적으로 만들어내는 결과들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의 측면에서의 규모를 생각해본다면, 이미 이미지 자체가 의미의 영역을 넘어 우리 삶의 감각적 현실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여기서 미디어 아트의 환영(illusion)이 아닌 환상(fantasy)으로서의 특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 속에서 창조되는 세계를 예술의 속성에서 중요한 척도로 간주한다면, 현대사회의 배우들과 광고 이미지들은 또 다른 차원에서 하나의 세계를 구성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환상은 지속적이지 못하다 -물론 환상을 하나의 세계로 제시하는 가상현실의 차원에서 생산되는 예술작품을 생각하면 지속성의 문제에 관해서는 또 다른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지속적이지 못한 것은 우리의 오성(understanding)이 요구하는 질서와는 다른 것이다. 우리가 예술작품을 설명하면서 자주 인용하는 영원성 같은 언어들은 이미 새로운 형식의 미학적 질서를 설명하기에 적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새로움 자체에 대한 설명도 될 수가 없다.

   이한수의 작품에서 환기되는 이미지의 범람, 즉 스펙타클한 광경들이 만들어내는 상황들은 예술이 사회적 현실과 타협한다거나 혹은 비예술적 상황을 하나의 예술현상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것으로 볼 수 없으며, 스펙타클 자체가 다원성이며 그 다원성이 어떤 뿌리를 가지고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종합적인 상태를 지향하는 지금 이 시대의 문화의 방향과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종교는 삶의 구조가 가지는 다양성에 근거하여 삶을 이해하는 방식이 될 수 있는 것이고 혹은 21세기적인 삶의 긍정적 측면들을 발견하고자 애쓰는 한 예술가의 작업방식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예술가의 임무는 미국의 예술철학자 단토의 말처럼 비가시적인 것들을 어떤 의미 연관 속으로 들여놓는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다원성과 스펙타클한 이미지들로 충만한 사회의 다양한 단자들(monad)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의미와 해석의 영역에 가두어 놓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미학적 가능성으로의 통로를 통해 예술을 우리 삶의 세계로 소통시키고 전환시키고자 하는 의지의 현현(revelation)이자 계기(momentum)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